산상수훈의 복음 (1)
   박만수 ( )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한 산상수훈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 땅에서의 생활방식과 모습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환난에 대비하는 삶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의 복음은 말뿐인 복음이 아니고, 삶의 열매를 통해서 입증되는 복음입니다. 산상수훈의 복음에 대한 건전한 해석을 통해서, 십자가 진리를 무시한채 산상수훈을 왕국의 고등율법으로 왜곡시킨 해석의 뜸씨들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용이 다소 길기 때문에 글을 둘로 나누어, 산상수훈의 복음(1)과 산상수훈의 복음(2)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자신의 교리적 관점에 따라 세분하여 기막힌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기독교 천재들 때문에 성경의 생명의 맥이 잘려나가고 지적 교만의 영에 미혹된 많은 사람들이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성경해석을 역사적 해석, 교리적 해석, 교훈적 해석으로 나누는 세대주의 해석의 함정은 역사적, 교리적 모순을 죄다 교훈적으로 무마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가령 교리적으로 유다인에게 해당된다고 했다가 모순이 발견되면 교훈적으로 교회에게 적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함으로써 얼마든지 합리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교훈과 별개로 취급될 성질이 아닙니다. 교리와 교훈은 원래 둘다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나온 같은 개념으로서, 주님의 모든 가르침은 교리인 동시에 교훈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이 유다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다는 주장 이면에는 마태복음이 교리적으로 유다인에게 해당되며, 교회는 교훈적 적용 외엔 사실상 무관하다는 주장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논리대로 하면 비단 마태복음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사실상 유다인의 성경이고 교회는 교훈적 적용 외에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성경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전체가 유다인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로부터 신약성경을 박탈해가고자 하는 대단히 위험한 신학사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은 사실입니다. 구원이 유다인에게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듯이 히브리 민족인 유다인은 새로운 민족인 그리스도의 세대의 표상이었을 뿐입니다. 유다인은 무대장치를 제공하였고, 정작 주인공은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적 유다인이 지상왕국의 주인공이라는 세대주의 주장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고자 했던 유다인들의 지상왕국론과 일맥상통하며, 바리새파에서 발전한 카발리즘과 프리메이슨의 지상왕국론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기독교 안에 침투하여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이같은 뜸씨들을 색출하여 제거하지 않으면 말씀과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히브리인, 야곱과 이스라엘, 유다인을 강조한 것은 육적 혈통과 혈통에 따른 민족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강을 건너 분리된 무리, 옛사람에서 이름이 바뀐 새 사람, 배도하지 않고 남은 자로서 십자가의 진리를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참 유다인의 왕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육적 유다인들은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육적 유다인의 기득권과 지상왕국론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십자가의 진리를 약화시키고 무효화시키려 하는 세대주의 교리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히 분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이 유다인의 왕의 족보라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데, 바로 마태복음 1장 1절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시며, 다비드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의 책." 이 한 구절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짓는 분기점의 말씀으로서, 신약성경의 제목으로 계시된 구절입니다. 마태복음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의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마태복음은 유다인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를 위한 책이라는 사실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는 누구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들, 그들이 바로 택함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유의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장의 내용은 유다인의 왕의 족보와는 전혀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여럿이 들어가 있고, 족보에 포함시키지 않는 여자들도 들어가 있으며, 심지어는 창녀들과 죄인들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공통점은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세대라는 데 있습니다. 즉, 예수님 탄생 직전까지의 구약시대 믿음의 사람들을 나열함으로써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다비드 역시 믿음의 사람으로서 들어가 있는 것이며, 다비드 왕좌는 육적 유다인의 왕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좌의 예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다인의 메시야를 가리키는 메시야란 단어 역시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요한복음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다비드 왕좌가 유다인의 메시야 왕좌라는 세대주의 주장은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을 순수한 눈으로 살펴보면 모순투성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비드라는 인명 표기조차 히브리어식 표기가 아니라 그리스어식 표기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비드 왕좌가 이방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지상왕국론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대주의는 이 사실을 교묘히 재해석하여 유다인의 거부로 왕국이 연기되었고, 연기된 지상왕국이 다시 회복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거부한 유다인의 지상왕국론을 사실상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교리로서, 세대주의 시나리오를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해 왕국연기론이란 황당한 주장을 정당화함으로써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으로 평가절하시켰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신부인 영광스러운 교회조차 괄호안에 묶어 버림으로써 신성모독의 치명적인 뜸씨라는 사실을 자증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는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과 하늘왕국을 세 종류의 별개의 왕국으로 주장하지만, 이 역시 성경의 용례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된 주장입니다. 세대주의는 하늘의 왕국이 마태복음에만 나오므로 사실상 유다인의 지상왕국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보이지 않는 왕국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왕국은 교회에게 적용시키고, 보이는 실제적인 왕국은 육적 유다인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유다교 지상왕국론과 시오니즘을 은밀히 조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의 용례는 이같은 극심한 왜곡에 철퇴를 가합니다. 마태복음 4장 12-17절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 이방인의 갈릴리와 카페르나움에 거주하시면서 비로소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늘의 왕국은 처음부터 유다인과(마 3:2)과 이방인에게(마 4:12-17) 공평하게 선포되었음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보다 결정적인 철퇴의 말씀은, 마태복음 8장 11,12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말하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하늘의 왕국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콥과 함께 앉으려니와, 왕국의 본 자녀들은 바깥 어두움 속에 내던져지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한 말씀만으로도 하늘의 왕국이 유다인들의 지상왕국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하늘의 왕국이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유는, 마태복임이 유다인의 지상왕국복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인 마태를 통하여 유다인 지상왕국론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보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외에는 하늘의 왕국이라는 문자적 표현에 나타난 해석만 남게 되는데, 하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란 표현은 소유격(of)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왕국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이 땅에 속한 왕국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왕국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땅에 속한 왕국을 주장하는 유다인 지상왕국론이 오히려 오류임을 입증합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의 왕국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왕국도 여러 번 나옵니다(마 6:33; 12:28; 19:24; 21:31,43). 특히 마 6:33은 바로 앞절(32절)이 보여주듯이 유다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함으로써,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 별개의 왕국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마 21:43 역시 하나님의 왕국을 유다인들에게서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겠다고 경고함으로써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하늘의 왕국의 용례와 다른 복음서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왕국의 용례를 비교해 보면, 이 두 표현이 사실상 동일한 왕국에 대한 두 측면의 설명임을 증명해 줍니다. 직접 비교하여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마 3;2; 4:17)와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막 1:15); 하늘의 왕국이 영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마 5:3)와 하나님의 왕국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눅 6:20); 하늘의 왕국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콥과 함께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앉는다(마 8:11)와 아브라함, 이삭, 야콥이 하나님의 왕국에 있고,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왕국에 앉는다(눅 13:28,29); 하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마 11:11)와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눅 7:28); 씨 뿌리는 비유는 하늘의 왕국의 비유다(마 13:24)와 씨 뿌리는 비유는 하나님의 왕국의 비유다(막 4:26) 등등등..... 

 

성경의 용례로 볼 때,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동일한 왕국에 대한 두 방면의 표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왕국이란 뜻을 나타내며, 하늘의 왕국이란 하나님의 왕국이 비록 땅에서 다스릴지라도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밖에 딤후 4:18의 그분의 하늘 왕국(his heavenly kingdom)이란 표현은 의미상으로는 하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과 같으며, 장소적으로 현재 하늘에 있다(in heaven)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문법적으로 heavenly와  of heaven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며, 단지 of heaven이 소속(of 속격)만을 나타내는 반면 heavenly는 소속과 아울러 장소를 나타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아버지의 왕국이 하늘에서는 성취되어 있고, 땅에 성취될 일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 6:10). 바울이 언급한 그분의 하늘 왕국이란 이미 하늘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가리키며, 그 왕국이 현재 하늘에 있으되 곧 땅에서도 성취될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의 용례에 따른 정확한 해석을 무시한채, 무리하게 하늘의 왕국을 유다인의 지상왕국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영적인) 왕국으로 분류한 세대주의 구분은 명백한 오류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의 5-7장의 산상수훈이 어떤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묘한 이론과 지식의 메스를 사용하여 성경의 맥을 끊어 놓고, 대신 인위적인 해석의 틀을 만들어 성경에 계시된 십자가의 복음을 가려 버리며, 사람의 지식에 매료되어 미혹된 수많은 사람들을 고등율법의 저주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뜸씨의 실체를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의 밝은 빛으로 확인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