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기독교 역사에서 AD 4 세기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313 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서 교회를 향한 박해는 사라졌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목숨을 건 논쟁들이 이어졌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 중 하나는 “예수가 과연 신이냐 인간이냐”는 문제습니다. 논쟁은 로마가 아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발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이자 신학자던 수도승 아리우스는 신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고,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기를 든 사람은 아타나시우스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와의 싸움에 려 20 년 동안 유배되었지만,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가지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수호하습니다. 결국 두 교부의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일단락되었고, 그 결과 지금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정통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 성육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들은 묻습니다. “도대체 왜 신학자들은 쓸데없는 논쟁으로 목숨을 거는 것입니까? 그냥 서로 양보하고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고백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사랑은 곧바로 자기 의를 자랑하고 형제자매를 시험에 들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고 진정한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 장 34 절이 증거하듯,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울부짖으며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복음서 저자가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고통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일까요? 이 본문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함께 죽음을 맞이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인간이 맞이하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버리시는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버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 스의 논쟁도 이와 연결됩니다. 아리우스는 예수가 반신 반인(半神半人)으로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되셨 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은 침해 받지 않 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 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는 십자가 위에서 함께 최후를 맞이하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고 주장하며, 아리우스파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교리를 타파하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말이 육신이 되셨다는 교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고로 주님의 자녀인 인간도 각자의 죽음앞에 과 육의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그의 죽었던 육체가 완전히 부활하며 다시 사심을 보여주셨듯이, 복음을 믿는 자 들에게도 동일한 육의 완전한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새롭게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담대히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성령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각자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십자가의 유일한 소망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해 평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매일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다시 부활하는 믿음을 지니신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